[경쟁력 원천 수학·과학 뿌리째 흔들]美·中 '50년 먹거리' 보고 기초과학 키우는데...韓은 하향 평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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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8.07.30. 오전 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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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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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해외 상반된 교육정책
선진국 AI 오픈소스 바탕되는 선형대수학 등 교육 올인
韓은 이공계 경쟁력 약화 부추겨 성장 동력 확보 차질
전문가들 "기초교육 잘 닦아놔야 신산업 응용력 커져"
자료출처: OECD,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서울경제] 지난해 3월 개봉한 영화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에서 흑인 여성 캐서린 존슨은 지난 1960년대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극심한 차별에도 굴하지 않고 결국 인류 우주여행을 뒷받침하는 주역이 된다. 그는 백인 상사가 기밀문서라며 데이터의 절반을 가리고 문제를 풀어보라고 하자 “숫자는 거짓이 없다. 행간을 파악하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며 날을 지새워 해법을 찾아낸다. 마침내 그는 첫 유인우주선 궤도를 계산하고 1969년 인류 최초로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이처럼 수학은 인류 문명과 과학 발전사를 뒷받침해왔다. 자주 접하게 되는 구글의 검색엔진이나 페이스북의 친구 추천 알고리즘도 알고 보면 수학이 인프라로 작동하고 있다. 구글의 인공지능(AI) 오픈소스인 텐서플로어도 선형대수학·확률론·미적분 등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미국은 일찌감치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강화에 적극 나서왔고 요즘은 예술을 추가해 ‘STEAM’을 강조한다. 물론 주입식·문제풀이식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기초개념을 튼튼히 한 뒤 응용력을 발휘하도록 한다. 미국 과학진흥협회(AAAS)는 연례회의에서 시민 수만명이 과학 강연을 듣고 토론하는 자리를 갖는데 오는 2061년까지 수학과 과학기술을 세계 최고로 끌어 올리겠다는 ‘프로젝트 2061’을 야심 차게 추진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프랑스·싱가포르 등도 대학 입시에서 STEM 과목의 비중을 늘리고 있다. 영국·핀란드·에스토니아 등은 수학·과학이 바탕이 된 코딩(coding)을 의무교육으로 했다. 에스토니아의 경우 2012년부터 전 학년 코딩 교육에 들어가 C언어·자바·파이선 등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창의적이고 논리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키워주고 있다. 토마스 헨드리크 일베스 에스토니아 전 대통령은 지난해 방한해 “과거 문맹자가 큰 핸디캡이었다면 이제는 코딩이나 프로그래밍을 모르면 안 된다”고 말했다.

세계경제포럼(WEF)은 2016년 발표한 ‘2020년 미래 고용보고서’에서 STEM에 기반해 사회적 감성과 융합적 소양을 갖춘 인재 교육을 역설하고 노동시장의 급변에 맞춰 교육 혁신을 주문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교육부가 ‘문·이과 통합’ ‘학생부담 경감과 사교육비 절감’을 내세워 오히려 수학·과학 교육을 약화시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입 수능시험에서 2021학년도부터 ‘기하·벡터’를 빼고 2022학년도부터는 이공계 희망 학생도 확률과 통계, 미적분 중 택일하고 과학Ⅱ(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 심화과정)도 없애며 문·이과 모두 과학탐구Ⅰ의 한 과목과 사회탐구의 하나를 각각 선택하도록 했다.

이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올 2월 제4차 과학기술기본계획을 통해 수학·과학 교육의 질적 수준을 세계 36위(2016년)에서 2040년까지 15위로 끌어올리겠다고 밝힌 것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대학 이공계 위기론이 대두된 지 한참 된 상황에서 ‘역학의 기본’인 기하와 ‘이공계의 뿌리’인 과학Ⅱ를 배우지 않는다면 이공계의 기초체력 저하와 4차 산업혁명 실패로 이어질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도 수능에서 서울대만 과학Ⅰ과 과학Ⅱ에서 다른 과목을 각각 하나씩 의무화했을 뿐 나머지 이과생들은 과학Ⅰ과 과학Ⅱ 가리지 않고 두 과목만 택하도록 돼 있어 과학계에서는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뜩이나 과학고·영재고 학생들의 국제올림피아드 성적이 전반적으로 추락하는 상황에서 수학·과학의 하향 평준화가 가속화되면 국가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김명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장은 “수능에서 기하와 과학Ⅱ를 빼고 어떻게 과학기술 인재를 기르고 4차 산업혁명에 성공할 수 있겠느냐”고 지적했다. 채규현 세종대 물리천문학과 교수는 “지금도 이공계생의 기초 역량이 충분하지 않은데 더 떨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수학·과학 등이 튼튼해야 미래 성장동력을 확충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향숙 대한수학회 회장(이화여대 교수)은 “영국 수학자 앨런 튜링이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암호를 해독한 데 이어 컴퓨터의 원조인 튜링 머신을 개발하는 등 수학은 과학기술 발전을 이끌었다”며 “데이터가 폭증하고 불확실한 시대에 논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분석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우려면 수학 등 기초과학을 강화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국회 교육위원회 간사인 오세정 바른미래당 의원은 “수학·과학 교육의 기초를 잘 닦아야 신산업에 응용이 가능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근본적으로는 학생들이 수학·과학을 재미있게 배워 창의적이고 논리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토대를 쌓아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학교에서 주입식 수업에다 내신도 달달 외워 실수를 덜 하는 학생이 유리하도록 하고 학생들은 문제 풀이식 사교육에 내몰리는 게 지속된다면 우리의 미래가 밝지 않다는 것이다. 일반고 과학중점반 2학년 고나영 학생은 “기하 등 수학·과학 학습량을 줄일 게 아니라 달달 외워 실수하지 않는 학생이 좋은 등급을 받는 내신 시스템을 바꾸고 공교육에서 수학·과학을 보다 흥미 있게 가르쳐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경무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한국학생이 미국에 유학하면 처음에는 수학·과학적 계산에서 앞서다가 머지않아 사고력과 문제 해결력에서 한계를 드러낸다”며 수학·과학 교육의 패러다임 전환을 촉구했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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