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까지 ‘영재학급’에서 일주일에 3∼4시간씩 다른 수업에선 접할 수 없는 것들을 배웠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 쓰인 암호를 해석하는 데에 실력이 있었다. 복잡한 암호를 풀어냈을 때 느껴지는 성취감이란…. 학교 수학시험을 잘 봤을 때와 차원이 달랐다.
거기서 그쳤어야 했다. 영재 학생이라면 당연히 밟아야 한다는 경로를 따라간 게 화근이었다. 고교 진학 후 교육청이 운영하는 영재교육반에 ‘화학 영재’로 들어갔다. 매주 토요일 7시간씩 수강하는 수업은 지루했다. 선생님이 “영재가 이런 것도 모르니?”라고 타박할 때마다 숨이 턱 막혔다. 집에서, 학교에서 “완벽해야 한다”, “하나라도 틀려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10문제 중 1문제라도 못 맞히면 주위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난 분명히 화학 영재인데도, 모든 과목을 다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다.
정말 나는 영재일까. 한때 영재였을까. ‘실패한 영재’임은 분명하다. 한국 사회에선 아무리 뛰어난 영재라도 좋은 대학 간판을 달지 못하면 낙오자가 되고 만다. 대학 입시에서 두 차례나 쓴잔을 마셨다. 첫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망치고 재수생으로 치른 수능에서도 영재의 성적표라고 보기 힘든 성적을 받았다. 결국 점수에 맞춰 별로 알아주지 않는 지금의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 화학과가 없어 전혀 엉뚱한 전공을 택해야 한다.
나는 대입을 거치면서 아주 평범한 대학생이 되었다. 한 친구는 “요즘 같은 세상에 그 대학 나와 미래가 있겠냐”는 말까지 했다. 그 후로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원인 모를 피부질환까지 생겼다.
돌이켜 보니 영재로 선발되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이 너무 컸다. 비단 나뿐일까.
그의 질문처럼 과연 이수민(20·여·가명)씨만의 문제일까.
우리나라 영재교육에서 정의하는 영재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으로서 타고난 잠재력을 계발하기 위해 특별한 교육이 필요한 사람’이다. 언뜻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발현된 능력(재능)’과 ‘발현되지 않은 능력(잠재력)’을 섞어놓았다. 현재 영재교육을 받고 있는 청소년들이 겪고 있고, 그 대열에 들어가려고 일찍부터 사교육시장에 발을 담근 어린이들이 겪을 혼란과 고충은 이 모순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창수·김주영 기자 winterock@segye.com
세계일보는 대한민국 영재교육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독자 여러분의 생각과 의견, 체험 등을 이메일(society@segye.com)로 공유하고 싶습니다. 보내주신 소중한 의견이 아이들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 세상을 보는 눈, 글로벌 미디어 세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