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도 경쟁이다보니 요즘의 사교육과 같은 과외수업도 만연했는데 그 역사도 오래되어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도경이라는 책에는 “고려에는 마을마다 경과와 사사가 2~3곳이 있고, 미혼의 자제들이 무리를 지어 경서를 배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의 대문호 이규보는 당시 개경에 있는 특목고라고 할 수 있는 ‘문헌공도’에 다니면서 어떤 선생의 집에서 ‘국자감시’를 대비하는 과외공부를 했다고 동국이상국집에 기록했는데, 정작 이규보는 세 번이나 그 시험에 떨어져 4수 만에 합격했다. 당시만 해도 공교육 학교가 각 지역마다 체계적으로 운영되기 전이니 이런 과외 수업은 학교와 학원의 중간쯤 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시험과 관련한 사교육 선생으로 세종대왕으로부터 포상을 받은 인물도 있다. 유생 유시덕과 박호생이 집에서 아이들을 잘 가르쳐 세종대왕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는데 그 이유가 10명의 제자를 모두 성균시에 합격시킨 과외선생 강경룡을 칭찬한 고려 말 충렬왕의 사례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이 요즘과 같은 보통교육 시대와 딱 맞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르치는 일을 하는 선생들에 대한 존중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찾아도 될 것 같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이야기처럼 과거시험에도 요즘 대입 전형논란과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응시자의 출신 가문이나 배경을 기준으로 선발하지 않고 경전의 암기 등으로 확인되는 객관적인 능력으로 선발하려다보니 응시자가 조선의 이념인 유학적 소양과 실무능력을 얼마나 갖추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곤란한 상황이라고 실학자들은 주장했다. 이들은 응시자의 도덕적 인성과 실무적 능력을 확인하기 위하여 시와 부를 짓는 시험이 아닌 국가정책을 논하는 시무책 등으로 시험 방법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논란이 일었고, 결국 갑오경장으로 과거 시험은 폐지되었다.
이렇게 우여곡절 속 오랜 세월을 이어온 시험인 수능 준비의 막바지가 되니 학생들은 마음이 오히려 담담해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또한 수시전형이 큰 흐름이다 보니 수능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학생들도 많다. 성공과 실패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수능의 관문을 넘는 수험생들이 모두 행운을 가져갈 수는 없다. 대신 다른 가능성의 문들도 많이 열려 있으니 우선 오늘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주기 기대한다.
한왕근 | 교육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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